* 금붕어의 역사
금붕어의 선조는, 붕어의 일종입니다. 돌연변이로 색이 빨갛게 된 개체를 인간이 장시간에 걸쳐
[금붕어]라고 하는 품종으로 고정한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북종(北宗)시대(960~1127)에는, 금붕어를
노래한 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실로 오랜 역사를 가진 것입니다.
최초에는, 일부 특권계급의 애완물이었던 금붕어도, 명(明:1398~1644)이 되면서, 널리 서민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최초, 색갈이한 붕어같은 모습이었던 금붕어는, 대량사육에 의해 선발교배되어, 형태도 모습도 다양한 품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육방법도 연못에서 길러지고 있던 것이, 물그릇이나 화분 등이 되어, 실내에 반입되게 되었습니다.
금붕어가 중국(明)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것은,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室町時代 말기, 文龜2년(1502)에 교역의 항구로서
매우 번창하고 있던 오오사카의 경계에 전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최고의 기록입니다. 또, 류킨(琉金)의 이름에 남아 있듯이,
오키나와(琉球)를 경유로 일본으로 도래한 금붕어도 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금붕어는 15~16세기에 일본에 전래해,
그 후 100년 이상의 세월을 걸쳐 서민의 문화로 침투한 것입니다.
寬延 1년(1748)에 간행된 [金魚養玩草]에는, 금붕어의 역사부터 사육법까지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금붕어]가 아니고, [황금 물고기(생선)]으로 불리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에도막부 말기가 되면 유리(디아망)가 보급해, 금붕어도 유리제의 용기로 사육되게 되었습니다. 금붕어구슬이라고 불리는 유리 용기는,
아름다운 금붕어를 한층 돋보이게 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풍속화의 그림제목을 시작해, 기모노의 무늬 등 금붕어는 여러가지
생각(디자인)으로서 칭찬받게 되었습니다.
* 난주의 등장
난주는, 붕어의 돌연변이인 일본붕어로부터 작출된 와킨(화금:和金)을 기초로, 마루코(丸子)로부터 개량된 품종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근대의 난주사육의 역사는, 메이지(明治)시대에 시작됩니다. 이 시대의 난주 취미는, 돈을 가진 남편의 오락으로, 양어가로부터
우수한 금붕어를 구해, 자택의 타타키연못에 사육인을 고용해 사육하는 것 같은 [놀이]이었다고 합니다. 오오사카, 쿄토, 하마마츠,
요코하마, 도쿄 등에서, 각각의 특징있는 난주, 그리고 사육법이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금붕어 그 자체, 기술의 교류 등이
행해져, 오늘의 난주사육의 기초가 쌓아 올려졌습니다.
메이지(明治)에서 타이쇼(大正), 쇼와(昭和), 헤세이(平成)라는 시대와 함께 사육방법이 조금씩 개량되어 가는 가운데,
특히 쇼와 3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친 열대어 붐에 의해, 사육기구나 어병약이 진보해, 입수도 용이해졌습니다. 특히 에어펌프,
에어스톤의 등장에 의해 봄부터 여름에 걸친 산소부족을 보충해, 사육이 즐겁게 되었습니다. 초기의 무렵은, 에어펌프를 사용하면
물고기가 매우 약하게 된다고 하는 선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육기구의 등장은, 금붕어 중에서 고가인 난주의 사육을
보급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각지에서 난주를 취급하는 업자를 늘리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일반인이 흑자를 입수, 사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난주사육열기의 고조 속에서, 취미의 모임이 각지에서 발족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근대의 난주사육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애호단체 [관어회]를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관어회]의 창립은, 메이지(明治) 18년(1885년)의 일로 제1회 품평회를 개최해,
메이지(明治) 33년(1900년)의 제17회 대회가 종가쪽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난주의 애호회로서는, 일본최고의 모임으로서, 매년 10월
제2일요일에는 많은 애호가가 전국으로부터 모입니다. 역사가 있는 예도(藝道)를 보면, 화도(華道:꽃꽂이)에서도 다도(茶道)
에서도, 가원(家元:본가,종가)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난주의 세계도 후세에 훌륭한 취미의 세계를 전하는
의미에서도 [家元]을 창출하려고 하는 것이 되어, 종가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시카와(石川)家입니다.
이시카와가문은 대대로 금붕어업을 경영하고, 그 4대째가 초대 이시카와龜吉씨입니다. 그 龜吉씨가 난주의 개량에 심혈을 기울여,
2대째 이시카와龜吉씨에게 그 업을 계승시켜, 여기에 초대의 [난주종가]의 이름을 계승했습니다. 차세대 이시카와秀三郞씨가 2세 종가를
계승하고, 현재 3세 종가로서 이시카와 아츠마사씨가 관어회를 주재 하고 있습니다.
또, 중부, 동북으로부터, 유명한 난주애호회가 있는 중에서, 전국의 애호가의 친목을 깊게, 감식눈의 보다 좋은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던 것이, [일본난주협회]입니다. 매년 11월에는 도쿄, 나고야, 오사카와 차례로 돌아가며 전국대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난주협회]의 총본부는, 종가인 이시카와가문에 있습니다.
* 난주의 즐기는 방법
열대어를 기른 적이 있는 분이나, 타종의 금붕어를 길러, 한 번 난주를 길러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편으로, 정원이 협소해 연못을 만들지 못하고 사육을 단념하고 있는 사람, 맨션이므로 사육을 단념하고 있는 사람도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열대어, 특히 대형어를 사육하고 있는 분이라면 75~90cm수조를 유지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규모의 사육설비라면 난주를
키우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만, 흑자부터 기르기 시작할 때는, 실내에서는 햇빛이 들지 않기 때문에, 색갈이때에 염색이 나쁘게 되므로
연구가 필요합니다. 색갈이가 끝나, 머리(육류)의 형태가 각으로 만들어져 오는 6~8월의 당세어로부터이면, 열대어를 사육하는 방법과
그다지 변하지 않습니다. 물대체가 많아지는 것, 1회의 먹이의 양을 한정(삭감), 급이 횟수를 늘려주는 정도입니다. 급이는 푸드타이머
(자동급이기)를 사용하면, 즐겁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품평회에 입상할 수 있는 난주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 난주의 세계로 어서오세요
내가 난주와 우연히 만난 것은, 중학생 때 였습니다. 친구가 근처에 [이상한 물고기]가 있을거야라고 말하므로 보러 갔습니다.
중학생의 양손에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크고 훌륭한 난주였습니다.
당시는 회사의 사장이나 의사 등 한정된 사람이 난주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본 집도 공장의 사장이었습니다. 연못은 10면이
있어, 지금 생각하면 大關(오제키)클라스의 난주가 헤엄치고 있던 것 같습니다. 나는 화금(和金)은 사육한 적이 있습니다만, 남부철의 풍경과
같은 흑자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존재감을 느꼈습니다. 즉시, 분양받아 난주의 사육을 시작했습니다. 근처에는 공장이 많고, 당시는
자재나 제품은 말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습니다. 그 [마차꾼]으로부터 말이 물을 마시는 낡은 수통을 받았습니다. 목재의 얇고 넓은 용기입니다.
먹이는, 근처에서 실지렁이나 장구벌레를 채집하는 [먹이 채집]을 잘 보고 있었으므로, 문제 없었습니다.
그리고 50여년, 지금도 난주로부터 멀어질 수가 없습니다.
처음의 사람은 물론, 몇년인가의 사육을 거쳐, 이제 알을 받고 싶은 사람, 몇번이나 알을 받았지만 선별로 고민하는 사람.......
앞으로 약간 기르는 방법을 바꾸면, 한층 난주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참고에, 조금씩 자신에게 맞은 기르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양필요 없어를 만들어 내 주세요.